본문 바로가기
알면 유용한 정보

이토 히로부미, 그는 누구인가

by 즈블리 2022. 11. 25.

이토_히로부미

 

존왕양이 운동을 벌이다


이토 히로부미는 1841년 야마구치 현의 농민 하야시 주조의 첫째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가난한 농민이었던 이토의 아버지는 이토 히로부미가 태어난 이후 이토 집안의 양자가 되어 무사 신분이 되었고, 따라서 성도 하야시에서 이토로 바꾸게 됩니다. 어릴 때 이토는 리스케, 슈스케라고 불렸는데 근현대 일본 우익사상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요시다 쇼인을 만나 그의 제자로 들어가게 됩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본격적으로 역사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존왕양이 운동 때였습니다. 존왕양이 운동이란 서구열강을 배척하고 천황 중심으로 나라를 이끌자는 운동으로 우리나라로 치면 위정척사 운동과 닮아있는데요. 위정척사 운동은 서양의 모든 문물을 배척하는 것과 달리 존왕양이 운동에서는 서양의 기술과 문화는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기조였습니다. 물론 나중에 이토는 이것을 이용해서 자신의 정적을 숙청하는 것에 영리하게 이용하기도 합니다.

 

서양의 발전된 문명에 충격을 받다

 

이토는 다카스기 신사와 함께 적극적인 존왕양이 실천파였기 때문에 1862년 12월에는 영국공사관에 방화를 하고, 막부를 지지하는 국학자 하나와 지로를 살해하는 등 열성을 보였습니다. 이 와중에 이토는 1863년에 이노우에 카오루와 영국에 유학을 가게 되는데요. 여기서 산업혁명 이후 발전하는 영국산업의 실상을 목격하고는 큰 충격을 받습니다. 서양이 동양에 비해 이렇게나 체제적으로 발전해있다는 것을 깨달은 그는 서양의 문화,문명,교육을 전반적으로 서둘러 받아들이지 않으면 일본 또한 그들의 희생양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됩니다.

 

에도 막부를 무너뜨릴 것을 결심하다

 

마침 이때 일본에서는 조슈내전이 일어나게 되는데요. 당시 이토 히로부미는 시모노세키 해협에서 외국 함성을 향해 포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조이운동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영국, 프랑스, 미국, 네덜란드 4개국 함대는 이를 복수하기 위해 조슈 항을 조만간 공격할 것이라는 소식을 영국에서 듣게 됩니다. 급히 귀국한 이토는 서양 강대국들과 싸우는 것은 무모한 짓이라며 막부를 설득했지만 결국 전쟁을 벌이게 되고 시모노세키항은 무참하게 파괴되며 그들과 굴욕적인 강화를 맺게 됩니다. 이것이 위정척사운동과의 큰 차이점입니다. 우리나라의 사대부들은 서양 열강들의 침입에 전혀 준비가 되어있지도 않았으며 오로지 목숨 걸고 전쟁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태도였는데 반해, 이토 히로부미는 자신이 존왕양이 운동을 주장하고 있지만 이대로 그들과 싸우면 자신들에게 미래가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따라서 그들에게 근대화를 배울 때까지 칼을 숨겨둘 줄 아는 무서운 사람이었습니다. 이러한 막부의 꼴사나운 태도에 분노한 이토는 다카스키 신사쿠와 함께 반란을 일으켜 번의 주도권을 빼앗으며 신 정부를 수립할 것을 결심합니다. 세력을 확고히 한 이토는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반막부 세력과 함께 시대에 역행하는 막부를 타도하는 운동을 벌이게 됩니다. 1866년에 사카모토 류마가 중재를 해서 사쓰마 번의 지도자 다이고 다카모리와 조슈번의 다카요시 사이의 삿초 동맹이 이뤄지고, 마침내 1868년 막부의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가 자신의 권력을 포기하면서 에도 막부는 멸망하게 됩니다. 이른바 메이지 유신의 시작이었습니다.

 

서양열강을 시찰하며 벤치마킹하다

 

이토 히로부미는 학제, 징병, 지조개정 등 일련의 개혁을 추진하고 부국강병의 기치아래 서양 제국주의 국가들을 철저하게 벤치마킹하여 자본주의 육성과 함께 군사력 강화에 힘쓰게 됩니다. 이토를 포함한 메이지유신 신정부는 실권을 장악해나가기 시작했고 이토 히로부미 역시 20대 후반의 나이에 오쿠마 시게노부와 이노우에 가오루와 더불어서 차세대 권력자로 정부의 요직을 담당했습니다. 그는 주로 외교문제와 대학교육에 관심을 기울였는데요. 1869년에는 효고 현 지사로 있으면서 서양학문의 보급을 주장하며 도쿄와 교토에 대학설립을 주도했습니다. 그는 대학을 설립하여 엘리트를 양성화하는 것이 강력한 군사 근대국가로 가는 첫걸음임을 강조했으며, 근대화의 성패는 교육에 달려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토는 이처럼 서양 근대국가의 제도와 문명, 교육을 추종했던 이유는 자신이 젊은 시절 접했던 영국 유학의 경험이 컸습니다. 그는 영국 외에도 서양 강대국들의 문명과 산업, 제도를 경험하고 싶어 했는데요. 그리하여 1871년부터 1873년까지 이와쿠라 사절단으로 파견되어 미국을 시작으로 유럽의 강대국들을 돌아다니면서 그들의 문화를 직접 시찰하였습니다. 이 때의 이토 히로부미는 서양이 했었던 것은 모조리 따라 하고자 했습니다. 심지어 서양이 기독교를 많이 빋고 있으니 천황 역시 기독교를 믿어야 한다고 건의했다가 숙청당할 뻔한 적도 있었습니다. 

일본제국의 최고 권력자가 되다


1873년 정한논쟁이 터지게 되고,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이와쿠라 사절단은 정한 반대의 입장을 취합니다. 조선을 공격하는 것보다는 근대화가 우선이라고 주장합니다. 당시에 일본의 군사력은 이미 근대화가 진행되어 조선을 제압하기에는 무리가 없었으나 더 큰 그림을 보고자 했고, 이러한 의견은 받아들여지게 되고 일본은 좀 더 체제 강화에 힘쓰게 됩니다. 정한 논쟁 뒤에 출범한 오쿠보 정권에서 공부성 초대 장관을 맡게 된 이토 히로부미는 근대적 공업을 육성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게 되는데요. 이후에 1878년까지 메이지 유신의 핵심이었던 사이고 다카모리, 기도 다카요시, 오쿠보 도시미치가 모두 사망하게 되면서 37살의 젊은 이토 히로부미는 메이지 정부의 중심이 됩니다. 그는 당시 오쿠보가 맡고 있던 내무장관에 임명되면서 재무장관 오쿠마 시게노부와 함께 메이지 정부의 중심축이 됩니다. 그러나 권력이 둘로 쪼개질 수가 없듯이 이토 히로부미는 오쿠마와 권력다툼을 벌이게 되고 여기서 메이지 14년 정변이라는 사건이 일어나게 됩니다. 오쿠마 시게노부가 영국의 내각책임제를 본받자고 급진적으로 주장하면서 자유민권 운동에 대한 수용의사를 밝혔다가 천황모독으로 이토에 의해 축출당한 사건입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자신의 정적을 축출해내는 것에 성공했으며 승리하며 명실상부 일본의 최고 권력자가 됩니다. 그의 나이 불과 40세였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총에 생을 마감하다


그는 입헌군주제를 즉각 도입하려는 오쿠마의 급진론보다는 좀 더 시간을 두고 먼저 일본의 헌법부터 제정할 것을 선언했는데요. 그는 1882년부터 헌법 제정을 준비하게 됩니다. 그 과정은 매우 치열했으며 본인이 직접 헌법 초안을 만드는 작업에 몰두하였고, 유럽에서 현지조사를 하여 프로이센 헌법을 벤치마킹했습니다. 그는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입헌제 도입에 앞서 내각제도를 일단 창설하며 스스로 일본 초대 총리대신에 오르게 되는데요. 이는 일본의 초대 국무총리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마침내 일본은 1889년 천황에게 절대군주의 명분을 법으로 확립하는 일본제국 헌법을 제정하게 됩니다. 이 헌법은 이토 히로부미가 직접 유럽에서 검토, 공부, 분석한 헌법이었으며, 외형적으로는 근대적 형태의 입헌군주제 헌법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천황의 신적인 주권을 인정하는 내용이었습니다. 후에 이토 히로부미는 총리대신 수상을 계속해서 역임하게 되는데요. 총리대신을 4번 역임하는 동안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조선을 식민지로 삼는 것이 확실해지자, 대한제국의 총감으로 부임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는 1909년에 러시아와의 외교문제를 위해 만주 시찰을 나갔다가 하얼빈 역에서 대한제국의 안중근 의사에게 피격당하며 생을 마감합니다.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