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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이 멸망하기까지

by 즈블리 2022. 11. 6.

 

오스만 제국은 발칸반도와 아나톨리아를 중심으로 유라시아, 아프리카 두 대륙에 걸쳐 광활한 영역을 지배하던 국가였는데요. 이번 포스팅에서는 이들이 어떻게 쇠퇴하고 결국에는 패망하게 되었는지에 대해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스만제국 멸망하기까지

1. 오스만 제국 쇠퇴의 시작 - 러시아 튀르크 전쟁

오스만 제국이 쇠퇴하기 시작하던 시기는 17세기 말 제2차 빈 포위전에서 패배하며 카를로비츠 조약을 통해 헝가리와 트란실바니아를 오스트리아에 넘겨주면서부터입니다. 그리고 18세기에 들어서면 오스만 제국은 상실한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서 오스트리아, 러시아, 베네치아 등과 전쟁을 펼치지만 계속해서 영토를 빼앗기게 되면서, 자신들의 힘이 약해지고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특히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는 부동항을 찾기 위해서 크림반도, 발칸반도, 폴란드, 이스탄불 해협을 장악했고, 때문에 오스만 제국은 상실한 영토를 회복할 수 있다는 일말의 기대를 접을 수밖에 없었는데요. 표트르 대제를 이은 예카테리나 2세 역시 부동항을 찾기 위해서 폴란드의 내정에 간섭하였습니다. 


폴란드인들은 이에 반란을 일으키며 오스만 제국으로 오스만 제국으로 피신하자 러시아군이 오스만 제국으로 침입하여 1768년 러시아 튀르크 전쟁이 발발합니다. 이 전쟁은 1778년 쿠슈크 카이나르지 조약이 체결되며 종료되었습니다. 이 조약으로 크림 공국이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였고, 오스만 제국은 흑해의 전략적 요충지였던 케리치와 아조프를 러시아에 넘겨주게 됩니다. 거기에다가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 내에서 러시아 정교도들을 보호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하였습니다. 쿠슈크 카이나르지 조약은 18세기에 가장 중요한 조약 중 하나인데요. 이 조약으로 러시아는 18세기의 영국, 프랑스에 이은 강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고, 오스만 제국은 더 이상 강대국이 아니라는 것이 확인되었기 때문이지요.

2. 그리스의 독립을 막지 못하다

이렇게 오스만제국은 날로 쇠퇴해져 가고 19세기에 들어서게 되면 오스만 제국 내에서 슬라브 족과 그리스인들의 독립운동이 계속해서 빗발치게 됩니다. 먼저 1822년 크레타 섬에서 그리스인의 반란이 일으나는데요. 자력으로 진압이 불가능했던 마무드 2세는 이집트에 지원을 요청했고 이집트는 크레타섬을 넘겨받는 조건으로 제국을 지원하여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인의 독립운동이 이집트의 지원으로 진압되자, 러시아와 영국, 프랑스 3국은 1827년 런던 회의를 통하여 그리스의 자치권에 대해 합의하고 그리스의 독립을 지원하기로 결의하게 됩니다. 


그리고 곧 유럽열강들은 그리스의 자치 인정과 그리스 영토로부터 튀르크인의 완전 철수를 요구했는데, 오스만 제국이 이를 거절하자 1827년  영국, 프랑스, 러시아의 연합 함대가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나바리노 만으로 진입하여 오스만과 이집트의 연합함대를 대파합니다. 결국 1829년 3월 영국에서 그리스 독립을 위한 의정서가 채택되었고, 그해 9월에는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의 에디르네 조약으로 오스만 제국은 그리스의 자치권을 인정하였으며 1832년 그리스의 독립을 최종 인정하게 됩니다.

 

3. 튀하흐야 조약의 체결

한편, 그리스 반란을 진압한 뒤에 이집트의 총리 메메드 알리 파샤는 오스만 제국에게 크레타 섬을 요구하지만 마무드 2세는 약속과 달리 이를 거부하게 되고, 이후에 시리아 지방 총독 임명 요구도 거부하면서 자신의 총리직마저 해임 위기에 처하게 됩니다. 그러자 매매드 알리 파샤는 1831년 시리아를 격파하고 1833년에는 아나톨리아의 콘야까지 진군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하는데요. 집트 군대를 당해낼 수 없음을 깨달은 오스만 제국은 또다시 외세를 이용하여 했지만, 프랑스는 이집트의 편을 들었고, 영국은 내전에 끼어들지 않겠다는 입장을 고수합니다. 


오스만 제국은 어쩔 수 없이 숙적 러시아에게 손을 내밀 수밖에 없었고 1833년 휜캬르 이스켈레시 조약에 따라 러시아는 이스탄불에 함대를 보내게 됩니다. 한편 영국과 프랑스는 러시아가 남하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집트의 매매드 알리 파샤에게 오스만 제국과 합의할 것을 종용하였고, 1833년 퀴타흐야 조약이 체결됩니다. 이 조약에 따라 매매드 알리 파샤는 이집트, 크레타, 시리아 지방의 총
독이 됩니다. 

 

4. 크림전쟁의 발발

이미 쇠퇴해버린 오스만제국은 이제 유럽 열강들에 의해 갈기갈기 찢기게 되는데요. 그 신호탄은 바로 1853년부터 발발한 크림전쟁이었습니다. 전쟁의 표면적인 이유는 쿠슈크 카이나르지 조약에 따라 예수살렘에서 러시아 정교의 권리를 보장하라는 요구에 오스만 제국이 거절한 것이었지만, 실제적인 이유는 부동항을 가지고 지중해로 진출하고 싶었던 러시아가 그 출발점으로 먼저 흑해의 주도권을 빼앗고 싶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영국과 프랑스 등 유럽 열강이 이를 지켜보고 있을리 없었습니다. 다라서 그들은 오스만 제국을 도와 러시아를 물리쳤고, 1856년 파리조약으로 전쟁은 종결됩니다.

 

5. 러시아, 이탈리아에게 연이은 패전

오스만 제국은 명목상 승전국이었지만 유럽열강은 오스만 제국을 패전국 취급하며 향후 오스만 제국의 국경은 유럽에 의해 결정될 것이라 하였습니다. 해상으로의 진출이 좌절된 러시아는 발칸반도 지역으로 눈을 돌렸고, 크림전쟁 이후 발칸지역의 세르비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왈라키아, 불가리아, 몰도바 지역에서 범 슬라브주의가 확산하면서 발칸반도는 그야말로 유럽의 화약고가 돼버립니다. 크림전쟁에 이어 1877년 러시아 튀르크 전쟁이 또다시 발생하였고, 러시아 연합군이 승리하여 루마니아,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등의 독립이 뒤따랐으며, 불가리아의 자치권도 확장되었습니다. 


이후 1897년에는 크레타 섬을 두고 제1차 그리스 터키 전쟁이 발발하여 오스만 제국이 일시적으로 크레타 섬을 지키기도 했지만, 1911년에는 이탈리아가 북아프리카 식민지 개척을 위해 트리폴리를 침공하여 이탈리아 튀르크 전쟁이 발생했고, 1912년에는 전선이 확대되며 이탈리아가 에게해 상의 섬들을 장악하는데요. 이는 오스만제국의 영토인 리비아 점령에 실패한 이탈리아의 전략이었는데, 같은 해 12월에 이탈리아는 오스만 제국과 우쉬 평화조약을 체결하여 리비아를 차지하는 대신 12개의 섬과 로도스섬은 오스만 제국에게 넘겨주기로 합니다. 

 

5. 1,2차 발칸전쟁의 발발

오스만 제국이 이탈리아에 패배하는 모습을 보이자 발칸 국가들도 독립전쟁을 준비하는데요. 1912년에 불가리아, 그리스, 몬테네그로 등이 발칸 동맹을 맺고 러시아의 지원 아래 오스만 제국에 선전포고를 하게 되고 1차 발칸전쟁이 발발하게 됩니다. 제 1차 발칸 전쟁의 결과, 오스만 제국과 발칸 국가들의 경계는 현 에디르네 밑의 두 도시 미드예와 에네즈를 잇는 선으로 결정함으로써 오스만 제국은 이스탄불을 제외한 유럽의 모든 영토를 상실하게 됩니다. 아울러 발칸 국가들은 제1차 발칸전쟁의 결과로 획득한 마케도니아 지방에 대한 영토 배분을 놓고, 1913년 제2차 발칸 전쟁을 시작하는데요. 여기에서는 세르비아와 불가리아가 강경하게 대립하게 됩니다. 


불가리아의 부상을 두려워한 루마니아와 그리스는 세르비아의 편을 들었고 불가리는 패배하게 됩니다. 이 틈에 오스만제국은 런던조약으로 빼앗긴 에디르네를 다시 되찾게 됩니다. 이로서 런던조약은 무효화되었고, 불가리아의 패전으로 1913년 부쿠레슈티 조약이 체결되어 도브루자는 루마니아가, 테살로니키는 그리스가, 마케도니아의 대부분은 세르비아가 차지합니다. 게다가 이스탄불 조약으로 불가리아를 가로지르는 마리차 강이 오스만 제국과 불가리아의 경계가 됩니다. 이렇게 두 번의 발칸전쟁으로 오스만 제국은 발칸지역과 에게해 상의 대부분의 도서를 상실하게 됩니다.

 

6. 오스만 제국의 멸망

이렇게 피폐해진 오스만 제국은 곧이어 발생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중립을 선언할 수밖에 없었는데요. 연합군은 오스만 제국이 계속 중립에 있기를 바랬지만, 독일은 오스만 제국이 코카서스에서 러시아와 싸우길 바랬고, 수에즈 운하에서 영국과 싸우길 원했습니다. 오스만 제국의 실권을 쥔 연합 진보당은 승세를 이어가고 있던 독일 편에 서면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을 수 있고, 영국과 프랑스, 러시아의 식민 제국주의 정책으로부터 구출되어 경제를 회복시킬 수 있을 거라 판단합니다. 


따라서 오스만제국은 독일과 1914년 8월 이스탄불 비밀협정을 체결하였고, 오스만 제국은 참전 준비를 하여 이스탄불 해협을 폐쇄하였습니다. 이후 독일의 함대가 오스만 제국의 도움으로 흑해로 나아가 러시아 항구를 폭격하였고, 1914년 11월,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에 선전포고를 하였습니다. 이렇게 해서 오스만 제국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게 되는데요. 1차 세계대전이 독일과 오스만 제국의 패배로 끝이 난 후, 파리에서 
강화 회의가 시작되어 아나톨리아 분할을 논의하였지만, 합의에 이르지 못하자 1920년 8월 연합군은 오스만제국의 아랍지역 영토 모두를 포기시키고 동부 트라키아와 행정권을 그리스에 넘기며 오스만 제국의 주권을 반 식민지 상태로 제한하는 내용의 세브르 조약을 체결하여 사실상 오스만 제국을 해체하였습니다.

 

7. 무스타파 케말의 등장과 터키 공화국의 성립

하지만 이 굴욕적인 조약을 거부하는 오스만제국의 영웅이 나타나는데, 그가 바로 무스타파 케말입니다. 그는 1919년 파리 강화 회의가 한창 진행 중이던 시기에 터키 해방 운동을 동시에 시작합니다. 그는 앙카라를 저항운동의 본거지로 하여 새로운 국가를 설립할 의사를 천명하고 국민회의를 개최하였으며, 국민 헌장을 발표하고 의회도 개원하였지요. 이와 동시에 1921년 대 그리스 주의에 의하여 발생한 제2차 그리스 튀르크 전쟁에서 그리스의 군대에 맞서 승리하며 국민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게 되었습니다. 마침내 1922년 9월 그리스 군은 최종 퇴각하였고 11월부터 새로 시작된 로잔 평화회의부터는 무스타파 케말의 앙카라 정부가 단독으로 터키를 대표하여 참석하였습니다. 


이 조약으로 터키는 세브르 조약 때 그리스에게 내주었던 행정권과 트라키아를 회복하였으며, 공식적으로 국가승인을 받게 되었고 10월 29일 터키공화국이 선포됩니다. 한편, 오스만 제국 제36대이자, 마지막 술탄인 메메드 6세는 1920년 굴욕적인 세브르 조약에 서명한 후 1922년부터 술탄직이 폐지되면서 술탄의 인장도 앙카라 정부에 반환해야 했습니다. 목숨이 위태로웠던 그는 영국군 사령관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영국 망명을 희망했고 이스탄불을 떠나 몰타와 사우디 아라비아 등을 전전하다가 
1926년, 이탈리아의 산레모에서 생을 마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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